"자유로운 삶"에서 "불완전고용"으로 — 일본 드라마가 그린 프리터 이미지의 변천

프리터 집을 사다와 히라야스미로 살펴보는 일본 프리터 이미지 변천사
 

한국의 노동 시장에서도 '프리터족'이라는 단어는 종종 불안과 걱정이 섞인 기사의 단골 소재로 등장합니다. 정규직 트랙에서 벗어나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유지하는 청년들을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은 대체로 날이 서 있습니다. 그러나 일본 대중문화와 사회 현상을 연구해 온 입장에서 그 흐름을 따라가 보면 '프리터(フリーター)'라는 단어를 대하는 드라마의 태도가 지난 15년 사이 크게 달라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010년의 드라마가 프리터를 '하루빨리 벗어나 정상 궤도로 돌아가야 할 상태'로 그렸다면, 2025년의 드라마는 '그 자체로 충분히 성립하는 하나의 삶'으로 그려냅니다. 흥미로운 점은 현실 속 프리터들의 경제 사정이 그사이 결코 나아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방영 시기가 15년 떨어진 두 드라마를 나란히 놓고 드라마 속 청년 노동의 이미지가 어떻게, 그리고 왜 달라졌는지 살펴보겠습니다.

1980년대 '낭만적 일탈'로 태어난 프리터

지금의 드라마를 이해하려면 먼저 이 단어의 출발점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애초에 프리터라는 말은 지금처럼 부정적인 낙인이 아니었습니다. 1980년대 후반 버블 경제의 황금기, 일본 언론은 프리터를 "조직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생활을 즐기는 세련된 직업"으로 소개했습니다(1987년 요미우리신문(読売新聞) 보도 등). 1987년 리쿠르트(リクルート)사의 아르바이트 정보지 「프롬에이(フロム・エー)」가 '프리 아르바이터'를 '프리터'로 줄여 유행시켰고, 1991년까지만 해도 기사에는 "최첨단 라이프스타일"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었습니다.

그러나 1990년대 초 버블 붕괴와 함께 찾아온 '잃어버린 20년'은 프리터의 의미를 완전히 뒤집었습니다. 취업 빙하기를 거치며 프리터는 자발적이고 낭만적인 선택이 아니라 닫혀버린 취업 문 앞에서 떠밀려 들어가는 '구조적 불완전고용'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2010년의 드라마는 바로 이 차갑게 식어버린 이미지 위에 서 있었습니다.

2010년 '탈출해야 할 상태'와 가족의 복원 – <프리터, 집을 사다(フリーター、家を買う。)>

아리카와 히로(有川ひろ, 출간 당시 표기 有川浩)의 소설을 원작으로 2010년 후지TV(フジテレビ)에서 방영된『프리터, 집을 사다』는 당시 일본 사회가 프리터를 어떻게 바라보았는지를 정확히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평균 가구 시청률 17.1%를 기록한 이 드라마의 주인공 타케 세이지(武誠治)는 25세입니다. 대학 졸업 후 입사한 회사에 적응하지 못해 3개월 만에 퇴사하고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는 그의 모습은 2000년대 이후 굳어진 청년 무기력의 전형입니다.

니노미야 카즈나리(二宮和也)가 연기한 세이지가 정신을 차리는 계기는 어머니의 심각한 우울증과 무너져 가는 가정입니다. 어머니를 지키기 위해 집을 사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토목 공사 현장의 육체노동에 뛰어들면서 드라마는 전형적인 성장 이야기로 흘러갑니다. 여기서 '프리터'는 미성숙함과 같은 말이자 반드시 넘어서야 할 출발점입니다. 주인공이 땀 흘려 일하며 사회에 자리 잡아 가는 과정은 곧 프리터라는 상태에서 멀어지는 과정이고 제목에 담긴 "프리터인데도 집을 산다"는 역설은 '정상적인 삶'으로 돌아가기를 바라던 당시 시청자들의 마음을 그대로 비춥니다.

2025년, 저성장 시대의 '있는 그대로의 긍정' – <히라야스미(ひらやすみ)>

그로부터 15년 뒤, 신조 케이고(真造圭伍)의 동명 만화를 원작으로 한 NHK 「요루도라(夜ドラ)」 『히라야스미』는 전혀 다른 결의 청년을 보여줍니다. 오카야마 아마네(岡山天音)가 연기한 29세의 이쿠타 히로토(生田ヒロト)는 도쿄 아사가야(阿佐ヶ谷)의 단층집을 물려받아 살아가는 프리터입니다.

히로토의 삶에는 세이지가 가졌던 처절한 절박함도, '정규직'을 향한 강박도 없습니다. 그는 그저 매일 저녁 무엇을 해 먹을지를 진지하게 고민합니다. 이 드라마에서 프리터는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 그냥 지금의 생활입니다. 2010년의 이야기가 "어떻게 프리터를 탈출할 것인가"라는 위를 향한 사다리를 다뤘다면, 2025년의 이야기는 "프리터로서 어떻게 일상을 지키며 옆 사람과 함께 살아갈 것인가"에 집중합니다. 저성장이 당연해진 시대에, 큰 야망 대신 소확행을 고르는 사토리 세대(さとり世代)의 가치관이 드라마의 주인공 자리까지 올라온 셈입니다.

현실은 가혹한데 왜 드라마는 느긋해졌을까

주의할 점은 드라마 속 프리터가 부드러워졌다고 해서 현실 청년들의 경제 지표가 나아진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일본 총무성(総務省) 노동력조사(労働力調査)에 따르면 2025년 15~34세 청년 프리터는 139만 명으로, 오히려 전년보다 3만 명 늘었습니다. 마이나비(マイナビ)의 조사에서는 청년 프리터의 78.3%가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다"고 답했고, 정규직을 원하는 이유로는 "고용이 안정적이어서", "고정급을 원해서"가 절반을 넘었습니다.

숫자는 여전히 가혹한데 드라마의 톤은 왜 이렇게 느긋해졌을까요? 저는 그 답이 시청자 쪽에 있다고 봅니다. 노력하면 정규직이 되고 집을 살 수 있다는 이야기가 더 이상 믿기지 않는 시대에 드라마가 건네는 위로의 방식이 달라진 것입니다. 닿을 수 없는 결승선을 보여주며 채찍질하기보다, 결승선이 없는 트랙 위에서도 하루하루를 다정하게 버텨내는 히로토의 모습이 지금의 시청자에게 훨씬 현실적인 위로가 됩니다.

시대의 불안을 다독이는 미디어의 새로운 생존 처방전

일본 드라마가 15년에 걸쳐 '프리터'를 그려낸 방식의 변화는 단순한 유행의 전환이 아닙니다. 이는 고도성장의 신화가 완전히 붕괴된 사회에서 대중매체가 시대의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내놓은 새로운 '생존 처방전'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2010년의 세이지가 짊어져야 했던 '정상성(정규직과 내 집 마련)에 대한 억압'을 걷어내고, 2025년의 히로토가 보여주는 '존재 자체에 대한 긍정'으로 서사의 중심이 이동한 것은 저성장 시대의 필연적인 결과입니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도 '프리터족'이나 'N포 세대'를 향한 시선은 여전히 2010년 일본의 잣대인 '걱정과 계도(啓導)'의 프레임에 갇혀 있습니다. 그러나 청년들이 도달해야 할 사회적 결승선 자체가 희미해진 현실 속에서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서사는 무엇일까요? 두 편의 일본 드라마는 우리에게 묵직한 질문을 던집니다. 지금 청년들에게 필요한 것은 더 빨리 달리라는 채찍질이 아니라 정해진 트랙에서 벗어나도 삶은 쉽게 무너지지 않으며 그 자체로 충분히 존엄할 수 있다는 감각의 회복일지도 모릅니다.

15년의 시차를 두고 방영된 두 작품을 나란히 비교해 보는 것은 단순히 일본의 대중문화를 즐기는 것을 넘어 지금 우리가 청년들에게 어떤 '괜찮은 삶'의 기준을 강요하고 있는지 뼈아프게 되돌아보는 인문학적 거울이 될 것입니다.


다음 이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