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앞을 나서는 순간부터 총성과 칼날이 오가던 암흑가의 거친 세계와 마트 마감 세일 스티커 한 장에 일희일비하는 주방의 풍경 사이에는 얼마나 먼 거리가 있을까.
한때 '불사신의 류(不死身の龍)'라 불리며 뒷세계를 호령하던 전설의 야쿠자 쿠로다 류(黒田龍)는 이제 식칼을 쥐고 저녁 밥상을 차립니다. 2020년 니혼테레비(日本テレビ)가 방영한 <극주부도(極主夫道)>는 매일의 가사노동을 전직 야쿠자의 치열한 승부로 그려내며 유쾌한 웃음과 묵직한 공감을 동시에 자아냅니다.
전직 최고의 야쿠자, 이제는 전업주부
부드러운 이미지였던 배우 타마키 히로시(玉木宏)가 주인공 류로 변신해 완벽한 싱크로율을 보여줍니다. 커리어우먼으로 바쁜 아내 미쿠(美久)를 대신해 요리와 청소, 장보기까지 살림 전반을 척척 도맡는 그의 일상이 이 작품을 이끄는 가장 강력한 재미이자 볼거리입니다.
격투 실력과 강렬한 인상은 여전하지만 이제 그가 진지하게 마주하는 상대는 특가 세일 정보와 이웃과의 관계, 그리고 산더미 같은 집안일입니다. 야쿠자 시절의 각오와 기술을 살림에 그대로 쏟아붓는 과장된 진지함이, 이 작품을 코믹하게 만드는 핵심 장치입니다.
원작은 오오노 코스케(おおのこうすけ)의 동명 만화로, 2018년 웹코믹 사이트 쿠라게반치(くらげバンチ)에서 연재를 시작한 이래 독창적인 개그 센스로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습니다. '전국 서점 직원이 뽑은 추천 만화(全国書店員が選んだおすすめコミック)' 상위권에 랭크되고 '다음에 올 만화 대상(次にくるマンガ大賞)' 웹만화 부문 3위에 오르는 등 작품성을 인정받았으며, 누적 발행부수 400만 부를 가볍게 돌파하며 신초샤(新潮社)의 간판 히트작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이러한 인기에 힘입어 2020년 10월 니혼TV(日本テレビ)를 통해 실사 드라마로 제작되었고 이후 넷플릭스 오리지널 애니메이션과 2022년 극장판 실사 영화로까지 이어지며 전방위적인 미디어믹스를 완성했습니다. 현재 한국에서는 넷플릭스(Netflix)를 통해 애니메이션과 극장판 영화를, 티빙(TVING)과 왓챠(Watcha) 등에서 실사 드라마 본편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웃음 뒤에 숨은 진짜 가사분담 이야기
류라는 캐릭터가 재미있는 이유는 "야쿠자와 주부"라는 극단적인 조합 자체도 있지만 이 설정이 완전히 허구적인 판타지만은 아니라는 점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일본에서 전업주부(専業主夫)의 비율은 2012년 기준 전체의 1.8%에 불과했고 일본 후생노동성(厚生労働省) 자료에 따르면 배우자에게 부양되는 국민연금 제3호 피보험자 중 남성은 2016년 기준 11만 명 수준이었습니다. 숫자만 보면 여전히 소수이지만, 이런 존재가 아예 없던 시절과 비교하면 "살림하는 남자"라는 캐릭터가 시청자에게 낯설지 않게 받아들여질 토양은 이미 마련되어 있었던 셈입니다.
가사분담 시간을 보면 변화의 폭은 더 뚜렷합니다. 10세 이상 전체를 기준으로 한 하루 가사 관련 시간은 남성 51분, 여성 3시간 24분으로 격차가 여전히 크지만, 2001년 이후 20년 사이 그 격차는 약 20분가량 줄어들었습니다.
6세 미만 자녀가 있는 부부 가구에서는 남편의 가사 관련 시간이 1시간 54분으로, 예전 조사보다 31분이나 늘었습니다. 류처럼 살림 전담까지는 아니더라도 가사에 시간을 쏟는 남성이 조금씩 늘고 있는 흐름 자체는 통계로도 확인되는 셈입니다.
그래도 여전히 기울어진 저울
다만 이 변화를 지나치게 낙관적으로만 볼 수는 없습니다. 맞벌이 가구에서도 아내가 가사 관련 시간의 77.4%를 담당하고, 전업주부가 있는 가구에서는 그 비율이 84.0%까지 올라갑니다. 류처럼 남편이 살림을 전담하는 가정은 여전히 드라마적 설정에 가까울 만큼 예외적인 사례에 속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작품이 웃음을 자아내는 방식도 의미심장합니다. 류가 겪는 고충들 - 장보기 요령, 이웃과의 관계, 자녀의 학교 행사 - 은 원래 많은 여성들이 아무 말 없이 감당해온 당연한 일들이었습니다.
살벌한 야쿠자의 살림 적응기는 익숙함에 가려졌던 가사노동의 고단함을 새삼 환기합니다. 야쿠자라는 자극적인 설정을 덧입히고 나서야 가사가 볼거리로 조명받을 수 있다는 현실은 평소 우리가 집안일의 가치를 얼마나 무심히 지나쳐왔는지를 돌아보게 만듭니다.
야쿠자의 세계를 떠나 마트 세일 전선에 뛰어든 류의 하루는 가사노동이 누군가의 일방적인 희생이 아닌 동등한 존중을 받아야 할 하나의 당당한 전문 영역임을 보여줍니다. 비현실적인 코미디의 외피를 두르고 있지만 극장을 나서거나 TV를 끈 뒤 마주하는 주방의 풍경만큼은 더없이 현실적입니다.
'누가 집안일을 할 것인가'라는 소모적인 줄다리기를 넘어 평범한 일상을 지탱하는 가사노동의 가치를 어떻게 인정할 것인가를 진지하게 되묻게 만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