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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라마 참고 이미지 |
'우바스테야마(姥捨て山)'에서 시작된 통쾌한 유리천장 깨기
드라마 <악녀 ~일하는 게 멋없다고 누가 말했어?~(悪女〜働くのがカッコ悪いなんて誰が言った?〜)>의 영어 제목은 'Bad Girl: Glass Ceiling Crushers'입니다. 마리린이 뚫어야 하는 건 흔히 말하는 유리천장만이 아니라 애초에 승진 경쟁의 무대에도 올라서지 못하게 만드는 지하 부서 그 자체입니다.
흥미로운 건 그가 승진하는 방식입니다. 마리린이 눈에 띄게 되는 계기는 뛰어난 업무처리 능력이 아니라 사내 정치에서 소외된 존재들 - 사내 미화원들과 나눈 인사, 사보에 실린 회사 역사를 기억하는 것 같은 사소한 순간들입니다.
회사가 공식적으로 평가하지 않는 관계와 태도가 오히려 그를 끌어올리는 힘이 되는 셈입니다. 한 시청자는 이 드라마를 보고 "유리천장도, 유리지하도 없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감상을 남겼는데 이 리뷰가 드라마가 지향하는 지점을 정확히 짚어냅니다.
이마다 미오(今田美桜)가 연기하는 마리린은 실수투성이지만 기죽지 않는 캐릭터로 냉정한 선배 미네기시를 연기한 에구치 노리코(江口のりこ)와의 케미스트리가 드라마 인기의 한 축이었습니다. 여기에 사내 미화원, 후배, 타 부서 동료 등 회사 안에서 눈에 잘 띄지 않는 사람들이 마리린의 조력자로 하나둘 등장하면서 일보다는 사람 우선이라는 정서가 승진 서사 전체를 관통합니다.
겉으로는 워라밸 안으로는 여전한 일 중독
워라벨을 주장하는 미시마(三島) 본인이 몸을 해칠 정도로 일에 매달려 있었다는 설정은 제도는 바뀌어도 일본사회의 일 중독 문화는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현실을 정확히 짚습니다. 육아와 일을 병행하려다 결국 '마케팅 부서의 에이스' 자리를 포기해야 했던 동료 카와바타 미쓰키(川端光)의 이야기 역시 일하는 엄마가 마주하는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담담하게 보여줍니다.
드라마 밖의 현실: 통계가 말해주는 유리천장의 견고함
일본 후생노동성 조사를 보면 격차는 승진 시점부터 벌어집니다. 30대에 계장급으로 승진하는 비율은 남성이 20.6%인 데 비해 여성은 5.9%에 그쳤고, 40대에 과장급이 되는 비율 역시 남성 24.5%, 여성 4.1%로 크게 벌어졌습니다.
관리직 전체에서 여성이 차지하는 비율도 부장급 8.3%, 과장급 13.2%, 계장급 23.5%로, 직급이 올라갈수록 여성의 비율은 더 가파르게 줄어듭니다. 마리린이 배치된 지하의 '비품관리과'는 이런 통계가 만들어낸 가상의 공간인 셈입니다.
드라마 후반부에서 사장 후계 다툼 속에서 한 후보가 당선되면 여성 관리직 비율을 50%까지 늘리겠다는 계획이 거론되지만 결국 백지화되는 장면이 나옵니다. 여성 관리직 확대가 회사의 확고한 방침이 아니라 누가 권력을 쥐느냐에 따라 언제든 뒤집힐 수 있는 사안으로 그려지는 셈인데 이는 실제 통계가 보여주는 더딘 변화 속도와도 겹쳐 보입니다.
정치를 배우는 것도 능력이다
초반에는 순진하게만 보였던 그가 후반부에 "사내 정치 좀 했습니다"라고 능청스럽게 말하는 장면은 이 드라마가 결국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보여줍니다. 조직 안에서 살아남는 법을 배우는 것 자체도 하나의 실력이라는 것입니다. 신입사원 마리린과 미시마 과장 세대, 여성과 남성, 정규직과 워킹맘까지. 이 드라마는 사내의 여러 계층에 있는 사람들이 저마다 다른 벽에 부딪히는 모습을 한 회사 안에 촘촘히 배치해 놓았습니다.
마무리
결국 이 드라마를 관통하는 건 수치화된 실적이나 화려한 성과가 아니라 '사람'입니다. 주인공 마리린(麻理鈴)을 지하 부서에서 지상으로 끌어올린 원동력은 사람들과 진심을 다해 부딪히며 성장한 덕이었습니다. ‘악녀(悪女)’라는 제목은 얼핏 계산적이고 차가운 승부사를 연상시키지만 마리린이 실천하는 방식은 영악한 계산이 아닌 타인을 향한 무조건적인 진심과 관심입니다.
사내 정치(社内政治)라는 단어가 주는 냉소적인 뉘앙스와 달리 이 작품이 그려내는 사내 관계는 결국 ‘누구를 어떤 태도로 대할 것인가’라는 본질적인 질문으로 돌아갑니다. 승진을 위해 사람을 도구로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주위 사람을 진심으로 대했기에 자연스럽게 승진과 인정이 뒤따른다는 이 '순서의 전복'이야말로 일에 지친 시청자들이 느끼는 따뜻한 위안이었을 것입니다.
유리천장이든 유리바닥이든 견고한 장벽을 무너뜨리는 힘은 차가운 제도가 아닌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뢰에서 피어난다는 메시지를 이 드라마는 마지막 회까지 묵묵하고 담담하게 보여줍니다.
다음 편 예고
*참고 : World Economic Forum, 「Global Gender Gap Report 2024」 — 일본 젠더격차지수 순위
일본 후생노동성 발표자료 — 관리직 승진 시기·비율의 남녀 격차 통계
